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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령님, 크리스마스에는 아직 파티가 필요합니다!

야옹음매 2024. 12. 25. 01:23

 


 

... 서프라이즈!

 

똑똑, 작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는 분명히 사무실로 들어오기 위한 수단이며, 스스로를 나타내기도 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다. 문 밖에선 키릴이 어색한 눈치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선물 상자가 들려있었고, 등 뒤로 돌려 문을 연 상대가 바로 선물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 있었다. 마치 열중쉬어, 자세와도 같은 이 모습은 키릴 본인에게 옅게 긴장감을 주게 했다. 그때 문을 향해 다가오는 걸음소리가 들리고... 키릴의 긴장감이 다시금 팽팽히 조여진 가운데 문이 열렸다.

"들어와도 좋네."

문 틈이 벌어지자 마침내 기다리던 얼굴이 보였다. 설원이 비칠 듯 하얗고 매끈한 뺨, 길게 뻗은 턱은 자꾸만 뱉는 말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백금발 머릿결은 무엇보다 그의 자취를 기억하게 해 떠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내의 어떤 것보다 강렬한 새빨간 홍채의 눈. 그 눈이 지금 키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습다는 듯, 아니 어쩌면 상냥하게 바라보는 그 눈에 키릴은 정확히 두 발자국 문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

"..."

복도와 사무실을 연결하는 문, 그리고 그 문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그 사이에 키릴과 사샤가 약 두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사샤는 꽤나 궁금한 눈치로 재차 고갯짓을 했지만 키릴은 아직 용기가 서지 못한 듯한 표정으로 작게 목례를 하곤 복도 밖을 향해 뛰어나갔다. 평소라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을 절대로 하지 않는 키릴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은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키릴 본인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키릴이 뛰어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사샤는 금세 등 뒤에서 다시 품 속으로 향하는 작은 선물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하. 아직 크리스마스가 재미있는 모양이야."

사샤는 키릴의 사소한 행동과 단 몇 초만으로 조만간 일어날 일들을 가볍게 예상할 수 있었다. 깜찍하게도 예의가 없는 부하직원을 부르려다 집무실로 들어선 사샤는 쿡쿡, 웃으며 테이블 위로 놓인 작은 선물상자를 바라보았다. 하하. 이거 꽤나 우스운 일이 벌어지겠군. 사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며칠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예고 라던가... 없는 겁니까?

 

 

 

2주 전, 사샤는 어린 여동생과 함께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작은 코하며 앵두 같은 입술, 저를 똑 닮은 머리칼과 눈은 새초롬해보였다. 자신의 딸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 없는 나이차의 여동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터, 그렇기에 사샤는 자신의 집무실에 여동생이 놀러 오는 날이면 문 앞에 키릴을 세워두고 한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키릴 또한 사샤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루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간간히 서류를 맡겨두고 가는 직원들을 제외하면, (그것도 두세 시간에 한 번일까..) 아무도 지나지 않는 복도는 점점 피로를 의식하게 했고, 하품이 터져 나오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키릴은 잠에 들지 않으려 발칙하게도 문 안쪽의 소리를 들으며 버티고 있었는데, 순간 잠이 훅 달아나는 것이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선 크리스마스에 어떤 선물을 가지고 싶으신가요?" 

이 삭막한 국경지대의 부대에선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맹랑한 목소리는 분명 사샤의 여동생이었다. 크리스마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신경조차 쓰지 않지만 어쩐지 그 말을 듣는 순간은 키릴 저도 모르게 크리스마스라는 일반인들의 연휴이자 한 해의 이벤트를 의식하고 말았다. 결국 이어지는 말들까지 듣기로 마음먹은 키릴은 문쪽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고, 거의 문에 달라붙듯 경비를 서고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전부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고 있어서요, 그런데 오라버니께서는 돈도 워낙 많으시고, 가지고 싶은 건 적으신 분 아니시겠어요? 이 여동생은 무얼 선물로 드릴지 걱정이라 잠을 못 자고 있답니다"

마치 자신의 고민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말투에서는 대담함까지 느껴졌다. 잠을 못 자도록 고민한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이겠지만, 은근슬쩍 이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말에서 상대방은 어쩔 수 없이 선물에 대한 본심을 토로하게 될 것이다. (키릴은 이를 생각하며 여동생에겐 함부로 말을 꺼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이런! 이 오라버니가 괜히 걱정을 시켰구나. 그래...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말이지.."

사샤 또한 여동생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묘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웃으며 인자하게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던 사샤는 문득 문 건너편의 인영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고, 이 집무실 안에 감도는 알 수 없는 공기에 웃음을 터트렸다. 제 선물을 취향을 궁금해하는 이가 한 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사샤는 조금 다양한 방식으로 이 깜찍한 질문에 대답하기로 한다. 

 

"생각해 보니 역시 오라버니에게 가장 큰 선물은 아리따운 여동생이 아닐까... 하는데, 이건 역시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겠지."

정확히 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여동생이 그를 무진장 째려봤으므로 사샤는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한참을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낯설었고, 진중했다. 문 건너편의 상대방에게도 어쩌면 힌트가 될  말들을 고르느라 꽤 애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음, 어쩌면 이 작은 집무실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구나. "

크리스마스 파티는 저택에서만 해봤으니, 말이지. 라며 웃는 사샤는 여동생의 입에 묻은 케이크를 닦아주었다. 키릴은 작년까지도 사샤의 저택에서 하던 아주 성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생각했다. 연말이라 하도 바쁜 부대에서도 사샤는 크리스마스일 때면 오후라도 잠시 들려 여동생을 보고 가곤 했다. 키릴은 그렇게 이동하는 사샤의 운전수 역을 자주 했기 때문에 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꽤나 성대한 듯 보이는 파티장은 밖까지 연주회 소리가 들리고 오가는 사람이 잔뜩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파티를 벌이는 이가 저택의 절반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집무실에서의 파티에 만족할까? 싶었던 키릴은 이제야 결심한 듯 결국 문에 귀를 붙였다.

 

"케이크를 두고, 작게 트리를 꾸미면 꽤 볼만할 테지."

그렇게 말하곤 쿡쿡 웃으며 문을 돌아본 사샤는 여동생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려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무엇보다도 네가 손수 만든 목도리가 이번엔 꽤 탐나는구나. 그 말에 여동생은 드디어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 만족한다는 듯 오라버니를 힘껏 껴안았다. 이후 바로 뛰쳐나왔으므로 문에 부딪힌 키릴이 복도로 나동그라진 것을 발견하곤 무척 놀라기도 했으나. 사샤의 걱정 말라는 손짓에 발랄한 아가씨는 무사귀환 했다.

하필 타이밍 좋지 않게 넘어져 바닥을 구른 키릴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사샤의 눈치가 꽤나 보이는 듯 구석으로 삐죽거리며 이동해 경례하는 키릴에게 가볍게 맞경례를 한 사샤는 키릴의 옷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곤 집무실로 돌아갔다. 별 말 없는 사샤의 모습에 오히려 놀란 키릴이었지만 티 내지 않고 다시 제 일터로 돌아가는 내내 그의 머릿속엔 크리스마스 파티, 케이크, 작은 트리. 그리고 선물로 잔뜩 차 있었다.


골라 봐, 뭐든?

 

 

 

 

한편, 사샤 또한 마음이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다른 이의 선물이라고는 한평생 여동생의 생일선물과 각종 이벤트뿐이었기에 이런 상황이 스스로도 매우 당혹스러웠다. 잘 보여야 하는 간부의 진급식이나 생일 때도 부하직원을 시켜 대충 알아서 선물을 사 오도록 시켰고,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위한 다른 생활에서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지 자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한다는 어떤 작은, 그러나 조금은 특별하게나마 느껴지는 일개 부하직원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 퍽, 낭비같이 느껴지면서도 신선했다.  

 

"그래.. 그러니까 이걸 키릴... 소령에게 주라고... 사 왔다는 거지."

며칠이 지나고, 부하직원을 통해 시켰던 키릴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집무실로 도착해 있었다. 선물을 골라 온 부하직원은 궁금한 것이 많아 보였지만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고, 사샤의 손에는 그 부하직원이 센스를 살려 구매한 선물이 들려있었다. 부대 내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다는 남성용 성인용품... 사샤는 물론 이를 확인하자마자 부하직원의 얼굴로 집어던지고야 말았다. 

.

.

.

"이건 아니고, 이것도.. 흠, 별로군"

곧이어 집무실의 바닥으로 수 차례 잡지들이 떨어져 내렸다. 잡지들은 전부 올해의 맨즈 패션, 올해의 픽, 최신 유행 남성 패션, 남성용.. , 패션..., 등등의 주로 20대 남성의 의복과 아이템에 대한 패션 잡지였다. 무례할 정도로 생각이 부족한 부하직원들을 대신해 '제대로 된' 선물을 고르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잡지나 화보들도 사샤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고, 이는 사샤를 굉장히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키릴은 제가 무엇을 쥐어주든 어린아이처럼 기뻐할 것이 뻔했지만 이왕이라면 꽤 만족스러운 선물을 주고 싶었기 때문에 고민되었다. 

 

"이거야말로 시간낭비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스스로 하는 짓이 어이가 없었던 사샤는 부하직원을 시켜 바닥의 잡지들을 전부 치우게 했다. 직원들이 잡지를 치우는 사이, 사샤는 다시 한번 키릴의 상세 정보 서류를 꺼내보며 찬찬히 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선물을 주기 위해서 신상을 털어대는 상사라니, 꽤나 끔찍하다는 생각에 웃음까지 피식, 튀어나왔다. 누가 본다면 징그럽다고까지 할 이 비틀린 애정은 마침내 글씨를 훑어내리던 손가락을 멈추게 할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센스,라고 해야 합니까?

 

 

모처럼의 휴가, 키릴은 번화가의 백화점 앞에 서 있었다. 휴가라고는 1년에 두 번도 잘 신청하지 않는 키릴은 주로 밀린 휴가를 연말에 겨우(그것도 재촉당해..) 사용하곤 했는데 이는 연휴를 함께 보낼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제대로 된 주거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대의 특성상 윗 선임이 휴가를 나가지 않으면 순서가 돌지 않았기에 간혹 키릴은 강제로 휴가를 써야 했다. 그럴 때마다 키릴은 큰 백화점, 상점가 등을 돌며 주변인들이나 사샤의 여동생에게 줄 만한 선물 등을 사곤 했다. 사샤의 여동생에게는 주로 머리핀이나 과자 등을 사주었지만 워낙 입이 고급인 데다가 제 오라버니의 선물공세로 이미 웬만한 것은 다 있을 거라는 동기들의 말에 최근 들어서는 선물을 줄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이 사샤의 집무실에 들릴 때마다 키릴이 선물한 머리핀 따위를 하고 온다는 것은 사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무튼, 그렇게까지 잘 사용하지 않는 휴가를 신청해 외박까지 해가며 백화점에서 이틀 동안 고른 것은 자신의 월급 수준에서 구매가 가능하고, 어쩐지 유행을 크게 타지 않을 것 같으며. 고가의 브랜드이긴 하나 사샤의 컬렉션 중 없는 것으로 보이는 브랜드의 넥타이 핀이었다. 연말이라 고위급 간부들의 파티에 여러 차례 끌려다니는 사샤를 보며 정장이 꽤나 잘 어울리는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키릴은 자연스럽게 매장의 구석구석에 위치한 넥타이나 넥타이 핀, 시계 따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넥타이는 색이 화려한 것을 착용하지 않던 취향이 떠올랐고, 시계는 조금 당황스러울만치 이어지는 숫자의 행렬에 조금 거리를 두게 된 것이었다. 

 

결국 선택한 넥타이핀을 고급스럽게 포장까지 부탁하고 나서야 키릴은 백화점을 나설 수 있었다. 

 

부대로 돌아오는 내내 포장된 넥타이 핀은 키릴의 손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덜컹이는 차 안에서도, 느리지만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도, 동료들이 뛰어다니던 복도에서도 그 작은 선물상자는 두 손 안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어딘가 보관할 장소가 필요했지만 장소는 마땅치 않았다. 무식한 부대원 녀석들이 있는 한 부대의 그 어떤 곳도 사실상 무법지대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키릴은 옷장 깊숙한 곳에 선물상자를 넣어두고 안심한 채로 잠들 수 있었다. 

 

사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명확한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명사로도, 동사로도 확실치 않은 대답에 키릴은 조금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고, 한 편으로는 사샤에게 자신이 이런 사소한 질문에도 대답하기 꺼릴 정도의 사이인가 고민하기도 했다. 키릴은 사샤를 아버지, 또는 형 정도로 느끼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샤에게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넥타이 핀을 고르면서는 선물을 받은 사샤의 반응을 기대하며 약간의 미소까지 머금었지만 막상 돌아와 생각해 보니 넥타이 핀 정도는 1년에 12번이라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에 쉽게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과연 사샤는 나의 선물에 기뻐할까? 간혹 그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는 날에는 밤새도록 한 생각에만 몰두하느라 다음날 훈련에서 실수하기도 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며칠 뒤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다. 연인들은 주로 이 날 서로를 만나 늦게까지 데이트를 하고, 가족들은 음식을 한 상 차려두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린아이들은 선물을 기대하며 잠에 들고, 어른들은 이를 깨우지 않으려 산타 분장까지 하며 지구상의 모든 이들이 설레는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면 기지의 부대원들은 어떨까? 무법지대와도 같은 군사시설의 남성들은 주로 휴가를 나간다. 이는 가족과 연인을 만나기 위함이며, 이렇다 할 만날 사람이 없는 부대원들은 숙소에 틀어박혀 이틀 내내 잠을 자거나, 호탕하게 술을 마시거나, 포커를 치는 등 그들만의 새로운 취미를 즐긴다. 빙하기라는 재난이 시작된 이래로 인류에겐 겨울과 여름, 봄과 가을이 사라지고, 설날과 추석, 크리스마스와 밸런타인데이가 무색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빙하기를 이겨내길 택했고, 겨울 속에서 희미한 봄을 찾았다. 설날과 추석엔 더욱 성대하게 거리를 밝혔고, 크리스마스엔 가게마다 캐롤을, 거리에는 트리를 세워두곤 했다. 인류는 모두 인생을 의식하며 살고 있었다. 

 

주욱, 얇은 칼 끝이 택배 상자의 테이프를 끊어냈다. 박스의 여닫이 부분이 열리고, 반짝이는 트리 장식들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둥근 장식용 볼들이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고, 은 빛으로 산개하는 모루 가랜드, 작은 인형들을 꺼내놓으며 키릴은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연말이라 계속된 파티에 감기에 걸린 사샤의 여동생이 이 작은 집무실 크리스마스 파티에 불참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키릴은 불편한 마음에 사샤의 눈치를 보며 파티를 취소하는 게 어떻냐고 했지만 전화통화를 듣고 있었던 여동생의 적극적인 파티 지지로 인해서 단 둘 뿐인 파티를 시작하게 되었다. 네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는 사샤의 말에도 완강한 여동생은 며칠 전 자주 들리는 백화점에서 흘깃 마주한 빨간 머리의 남자를 떠올리며 어떻게든 크리스마스 파티를 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이는 물론 곧 목이 쉬어버릴까 걱정한 사샤가 알겠다며 전화를 일찍 끊어버린 탓에 설득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제법 나는군." 

집무실 한편에는 작은 사이즈의 트리, 테이블은 붉은 벨벳 천을 올려두고, 벽면에는 작은 전구 가랜드를 걸어두니 꽤 크리스마스 같은 분위기가 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집무실을 한 바퀴 둘러본 사샤는 트리에 모루 가랜드를 설치 중인 키릴을 돕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제가 해도 괜찮습니다. 쉬시죠..."

"... 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야."

"..."

어색한 몇 번의 대화가 지나자 트리는 멋진 은색의 모루를 두른 채로 빛나고 있었다. 곧이어 작은 전구와 장식 볼, 인형 따위를 걸어두고 집무실에 책상 위에는 또 작은 인형들과 장식을 두었다. 문에는 작은 리스를 걸고, 집무실 내의 전등을 끄니 안락하고 따듯한 파티장 분위기가 되었다. 집무실에 마련된 작은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샴페인을 꺼낸 사샤는 키릴이 테이블에 올려둔 케이크 옆의 잔을 올려 들었다. 샴페인을 따곤 잔에 따르는 사이, 케이크에 하나 둘 꽂힌 촛불에 불을 붙이던 키릴이 조심스럽게 대화를 트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방금 전이라는 말로 보아 키릴은 노크 사건을 말하는 듯했다. 당연히 여동생의 부재로 열리지 않을 것 같은 파티에 성급히 선물을 전달하려다 도망친 그 사건말이었다. 물론 결국 파티가 열리게 되어 키릴은 사샤와 함께 마주 앉아 선물 증정식을 하게 될 터였다. 

"뭐 그 정도를 가지고... 자, 마시자고."

사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샴페인을 따른 잔 중 하나를 키릴에게 내밀며 가볍게 잔을 맞대곤 치얼스, 라며 중얼이는 사샤는 마치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조금의 당황도, 조급함도, 하물며 어색함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키릴은 괜히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키릴의 벗어둔 외투 주머니에는 여전히 작은 선물상자가 들어있었고, 집무실의 그 어디에도 키릴의 선물로 보이는 선물 상자는 보이지 않았기에 더 그랬다. 은근히 사샤의 선물을 기대하기도 했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진 키릴은 샴페인을 급히 들이마시기만 했다. 케이크를 자르던 사샤는 이를 보고 조금 놀라긴 했으나 역시 어린 게 좋군, 이라며 다른 소리를 해댔다. 

 

"그나저나 여동생분이 오지 못하게 되어 안타깝습니다. 감기는 괜찮다고 하십니까?"

연거푸 샴페인을 들이마시던 키릴이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여러 잔 마셔버린 샴페인의 알코올 때문일까. 난색의 조명이 주는 안락함 때문일까 점점 뺨이 따끈해짐이 느껴졌고, 긴장이 서서히 풀리고 있었다. 어색함이 마침내 풀리자 키릴은 조금, 대담하게도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전화로 소리 지르는 걸 보면 그렇게까지 심한 건 아니더군"

후륵, 짧게 샴페인을 들이마시던 사샤가 쿡쿡 웃었다. 그나저나 너무 마신 거 아닌가?라는 말에 키릴은 대답하지 못하곤 아니라는 듯 고개만 잘게 저었다. 사샤는 이를 바라보며 또 웃었고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실실 웃기까지 했다. 지금까지의 어색함은 다른 곳으로 간 듯 걱정 따윈 없는 모습이 더 공간을 따듯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웃고, 케이크를 잘라먹으며 사소한 대화를 나누자 키릴은 어느새 샴페인을 다섯 잔이나 마신 채였다. 사샤 또한 몇 잔이나 더 마셨지만 적당한 취기에 평소보다 한껏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마 그쯤이었을 것이다. 

 

"사실은 키릴군에게 줄 게 있어서 말이지."

사샤는 그렇게 말하며 집무실의 책상을 향해 걸어갔다. 또각, 또각,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구두 끝이 미세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곤 서랍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온 사샤의 손에는 사샤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선물상자가 쥐어져 있었다. 선물상자를 보곤 취기에서 벗어날 정도로 놀란 키릴은 지금까지 느꼈던 어색함이 순간 사라지고, 용기까지 들어 차기 시작했다. 사샤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키릴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받은 상자는 하얀 박스에 눈꽃 모양이 그려져 있었고, 제 머리색과 사샤의 홍채와 닮은 색의 붉은 리본으로 묶여있었다. 대답할 여유도 없이 풀어낸 리본이 바닥으로 힘 없이 떨어졌다. 

"... 아.. 이건.."

리본이 풀어지고 열어낸 상자 속에는 둥근 구형의 물체가 있었다. 작은 구형의 물체는 들어 올리자 유리로 된 구슬의 내부 속에는 눈이 내리듯 안의 반짝이와 작은 가루들이 떨어져 내렸다. 뭉쳐있던 가루들이 날리자 그 안에는 익숙하리만치 반가운 형상의 건물 모형이 들어있었다. 

어릴 적 살던 집과 똑 닮은 모습의 조형물, 주변에 새 조각이 있는 것까지 마치 제 어린 시절의 집을 작게 만들어 스노볼에 가둬 둔 것만 같았다. 

 

"어디서 사신 겁니까? 꼭 제가 살던 집처럼 생겼습니다..!"

깜짝 놀라 사샤를 바라보자 사샤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건물은 네 신상을 털어 찾아낸 어린 시절 집이고, 그 사진을 보내 주문 제작했으니 네가 알 수도 없단다. 따위의 생각을 하는 사샤를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키릴은 감동적이라는 듯 눈물까지 나올 기세로 감사인사를 하고 있었다. 사샤는 자신이 보고 싶었던 모습에 만족한 듯 후후 웃으며 마저 남은 샴페인을 들이켰다. 

 

"사실은 저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사샤가 샴페인을 들이켜는 사이, 스노볼을 한참이나 보다 일어선 키릴은 외투를 걸어둔 행거로 걸어가 주머니에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 포장한 지 며칠이나 지나 조금 구겨진 리본은 사샤의 선물보다 훨씬 우습게 보여 조금 부끄럽기까지 했다. 다시 취기가 오른 것처럼 붉어진 뺨은 어색하게 사샤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대단한 선물은 아닙니다... 그냥... 필요하실 때 쓰시라고..."

상상도 못 한 선물의 감동에 당황한 키릴은 괜히 풀어진 긴장을 다시금 느끼며 사샤의 앞에 섰다. 작은 선물 상자를 건네는 찰나의 시간까지도 사샤의 눈을 피한 키릴은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사샤가 선물 상자를 여는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넘기고 있었다. 

 

구겨진 빨간 리본을 풀어내고 상자를 열자 넥타이 핀이 주변의 조명에 순간 빛났다. 사샤는 말없이 상자를 가만히 보고 있었고, 키릴은 역시 누군가가 선물을 했거나 이미 가지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선물 센스를 저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뜻 밖에도 사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쩌면 며칠 전, 아니 2주 전부터 기다려올 말이었다. 

"이런... 키릴, 선물 고맙다. 예쁜 넥타이 핀이군."

순간적으로 자신이 들은 말을 다시 곱씹은 키릴은 자신의 선물에 사샤가 기뻐했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몇 잔의 샴페인도 풀어내지 못한 어색함을 한 마디로 풀어낸 사샤는 키릴의 반응에 쿡쿡 웃으며 긴장했구나,라곤 즐거워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키릴."

 

 

창문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한 겨울 뿐인 세상은 다시금 겨울을 향해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었고, 오늘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태양을 대신하듯 집무실을 빛내던 작은 전구들이 여전히 여러 가지 색을 뽐내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트리 장식들이 반짝거렸다. 테이블의 케이크는 어느새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고 샴페인도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서로 마주 앉은 두 남성은 이제는 완전히 풀어진 모습으로 샴페인 잔을 마주치고 있었고, 나란히 열린 선물상자들 속 선물들이 두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예,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사샤."